■ '해 뜨는 집' 설화 및 실화

설문대 할망은 제주도의 창조신화 속 여신으로 그녀와 관련된 설화가 어느지방이나 널려있다. 그중 이 마을 부근에 전해오는 설화는 이 할망이 식산봉과 일출봉에 양발을 딛고 우도를 빨래판 삼아 바닷물에 세답(빨래)을 했다는 내용이다.

또 일출봉에는 '바농상지(바느질 고리)돌' 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할망이 이곳에 앉아 바늘질을 했다고 전한다.




■ 오조리 식산봉은 옥녀산발형이라고 말한다.

그뜻은 아름다운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고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으로 여기 얽힌 슬픈 사랑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부씨성을 가진 한 총각이 '안가름' 섯동네 '불마술'이라는 곳(현재 부씨 도선묘가 있는 이웃밭)에 살고 있었는데 이웃집의 옥여라는 처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부씨 총각은 불미대장(대장장이) 의 아들로 한낱 천민에 불과했으므로 양반 신분이었던 옥여와 쉽사리 혼인을 할수없는 처지였다. 둘은 몰래 만나며 기회를 엿보고 은밀한 언약을 맺은 터였다.

그 무렵의 어느날 이 고을을 지미는 조방장이 마을의 거리를 지나다가 옥여의 아리따운 자태를 보고 그녀의 미모를 탐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놓아 가문과 내력을 알아보며 그녀 부모에게 그녀를 첩으로 달라고 청하게 되었다. 그는 내력을 알아보는 과정에 부씨총각이 옥여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녀를 첩으로 데려오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 시기심이 불끈 일어난 조방장은 관과로 돌아오자 없는 죄를 만들어 씌워 부씨 총각을 목매달아 죽이고 시체를 식산봉 동쪽 바닷가에 내다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옥여를 잡아들여 수청을 들라고 하였으나 끝에 거정을 심하게 당하자 고문하여 내쫒아 버렸다. 쫒겨난 옥여는 부씨총각을 찾아 헤매다가 식산봉 아래 해변에서 목졸린채 숨진 시체를 찾아내고 머리를 풀어헤친채 넋을 잃었다.

퍼져버리고 앉아있는 사이 어느세 그녀의 몸은 식산봉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또한 부씨총각의 시체는 맞은편 언덕인 '장시머들'로 총각을 감장하려고 마련한 관은 일출봉으로 변해 버렸다. 식산봉의 중턱에 나무가 우거지기 전에는 '창궁돌'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는 여인의 원한에 찬 눈처럼 조방장이 있던 '불미술'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우거진 나무들로 가리워져 있다.




■ '해 뜨는 집' 배이야기

오조리는 예로부터 소형선박의 대규모로 만들어 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포구에는 갖추고 있었던 이곳은 어로작업의 전진기지로서 다량의 선박을 예를들면 어떤때는 떼배 20여척을 한꺼번에 지을때도 있었다. 배의 종류에는 떼배, 당도릿배(덕판배), 싸움판배 세종류가 있는데 이들은 떼배-덕판배-싸움판배 순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떼배 : '터우' 또는 '테우'라고 하며 길이 15척의 긴 통나무 10~20개를 나란히 놓고 장세와 장쇠들을 신시라 끈을 사용하여 단단하게 엮어 매어서 장쇠끼우기 - 멍에세움-펭게틀목-상자리세움- 돛대굽기 만듬-세역박음의 순으로해서 제작된다.


당 도릿배(덕판) : '떼배' 다음에 출연한 배로 중국의 창크선과 같이 사다리꼴 모양의 배다. 떼배가 연안어로 작업이나 해초 채취에 필요하게 만들어 졌다면 이 배는 떼배를 발전시켜 수송수단으로 쓰이거나 바다중앙의 근해로 나가 어로작업을 할수있게 만든것이다.

'싸움판'과 비슷하나 '싸움판'처럼 앞부분이 뾰족하지 않다. 배의 밑바닥은 물에 잘뜨는 누룩나무를 이용하였다 한다. 덕판배의 크기는 6~7m, 폭이3m가 보통인데 이 덕판배를 이용하여 마을앞에 있는 성산포까지 돌을 실어다 팔기도하고 낚시도 다니고 잠수들도 실어다 날랐다. 돛은 초석으로 짜서 만들어 달았는데 이 베로 육지 출입도 했다고 한다.


싸움판배 : 당도릿배(덕판) 다음에 나온 '싸움판'은 일본병선의 모양을 본뜬것으로 물결이 저항을 가장 적게 받도록 뱃머리가 뾰족하게 되어있다. '싸움판'은 세개의 노를 갖고 있으며 배의 날개라 할수있는 '파락'이 있어서 파도가 심할때 배의 유동을 막아주며 돛을 두개 달수있다. 이배는 요즈음의 풍선과 거의 같은 배로서 이배를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해상 활동이 이루어 진것 같다.